<페드르> 감상문


정념적 존재의 비극 - 페드르를 중심으로


 라신의 <페드르>는 페드르가 자신의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여 일어나는 비극이다. <페드르>는 사랑의 감정과 그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충돌하며 파국을 맞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정념의 비극’이라 불리는 라신 비극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정념情念은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을 뜻한다. 페드르는 이폴리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며, 그러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페드르의 정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이폴리트는 페드르가 결혼한 테제와 아마존의 여왕 앙티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페드르가 이폴리트를 사랑하는 것은 ‘인륜’에 비추어볼 때 불륜과 근친상간에 해당하여 이중의 죄가 된다. 이는 인간에게 규범을 부여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다. 한편 페드르는 자신이 이폴리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 감정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하는데, 이는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려는 내적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사회적 규범과 인간의 이성은 정념을 억누르지 못한다. 페드르의 정념은 그 자신이 비너스가 불러일으킨 것으로 해석하듯이 초월적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어두운 불꽃’인 자신의 정념으로 인해 분열한다. 이폴리트를 향한 사랑과 그 사랑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야비한 타협’에 이르지 않고 팽팽하게 맞선다. 원하지 않았으나 이폴리트를 사랑하게 된 페드르는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길 원하게 되며, 그러한 자신을 억제하려 괴롭게 노력하는 것도 페드르 자신이다. 페드르의 사랑에 대해 극중 다른 인물들은 상황에 따라 가치 판단을 내리지만 페드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념과 정념을 없애려는 노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이다. 사랑을 실현하려는 욕망적 자아의 의지와 분열을 이성으로 통합하려는 사회적·윤리적 자아의 의지가 대등하게 충돌하는 것이다. 내부의 분열은 페드르가 외논에게 ‘처참한 고백’을 함으로써 ‘죄악’으로 드러나고, 극이 진행됨에 따라 페드르의 정념은 더욱 무거운 죄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페드르의 첫 등장에서 그녀의 명예를 지키는 의미였던 자살은 극의 결말에 이르러 속죄를 위해 바쳐진다.

 극중에서 파지파에, 아리안, 페드르에 이르는 ‘가련한 혈통’에 비너스가 내린 것으로 여겨지는 정념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성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대비되는 신적 숙명성과는 차이가 있다. <페드르>의 결말은 전능한 존재가 의도한 바의 실현이 아니라 극중 인물들의 행동이 맞물려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그 기원을 알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신이 자신의 정념을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때 상정되는 신은 상황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인간적 존재가 투영된 것이다. 페드르는 사회적 규범 속에서 이성적인 행동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인간이 실은 사랑, 분노, 질투, 고독, 두려움 따위의 감정에 휘둘리는 정념적 존재라는 것을 표상한다.

 고전주의의 법칙에 따라 구성된 라신의 <페드르>는 인간과 인생의 속성을 압축되고 완결된 이야기를 통해 나타낸다. 시간이 내포하는 무수한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개인이 처한 상황적 조건이며, 제한되어 주어진 몇 가지의 길 중에서 하나의 어긋난 길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정념이다. <페드르>는 정념에 휩싸인 한 인물이 결국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 세계이다. 라신은 페드르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미덕을 깨우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생생한 감정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가혹한 상황으로 괴로워하던 페드르가 죽어서야 비로소 갈등과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암담한 이야기이다. 비극의 밖에서 온갖 감정들을 떠안고 완결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정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무력함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by 새빙 | 2008/09/09 03:49 | 트랙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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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시작 at 2010/03/21 19:19

제목 : 영화속의 프랑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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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슈이엔 at 2008/09/09 07:09
와아 잘썼다... 정념이라, 근대에 와서야 복권된 심리철학적,실천철학적 주제랄까
Commented by 새빙 at 2008/09/10 20:47
버거운 덧글이네..
Commented at 2008/09/09 20: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inerva at 2008/09/10 01:12
이게 그 각고의 노력끝에 작성한...?!
Commented by 새빙 at 2008/09/10 20:51
결국 전날이 되어서야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그래봤자..우욱
Commented by quiet at 2014/10/17 17:53
혹시 페드르가 정념을 억누르기 위해 했던 노력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나요
Commented by ㅅㅂ at 2014/10/18 00:35
글쎄요 다시 읽어봐야 알겠는데요
Commented by quiet at 2014/10/19 14:42
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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